박재훈 목사님
암투병 박재훈 목사 작곡 '오페라 손양원' 내달 8일 막 올려
3월 8일부터 4일간 19:30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나환자의 발에 입을 대고 고름 빨아내는 손 목사 그림, 그 앞에 쓰러져 울었습니다. 그분 얘기를 완성할 때까지 죽지 않게 주님께 기도했죠
"병든 겨레" - 찢어진 남북, 물질만능주의, 손 목사의 희생·사랑·용서 그 정신을 전하고 싶어요."
"이 노래들, 제가 쓴 게 아니에요. 그저 불러주시는 대로 받아쓰기 바빴습니다. 나보다 더 내 몸 상태를 잘 아시지 않느냐고, 이 일을 제게 맡기셨으니 마치기까지 돌봐달라고 기도했을 뿐이죠."
올해 아흔살인 박재훈 목사(1922년생, 캐나다 토론토큰빛교회 원로)는 7년 전부터 전립선과 갑상선암을 앓고 있다.
이미 두 차례 수술을 받은 데다 고령이라 더 이상 수술도 어렵다.
협심증과 당뇨도 있고, 1년 반 전에는 백내장 후유증으로 왼쪽 안구를 제거했다. 말하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기적인 '움직이는 종합병동'이다.
그런데도 지난 9년간 "새벽 1~2시 전에는 잠들지 않으며" 오직 오페라 작곡에만 매달렸다.
'오페라 손양원'(지휘 이기균, 연출 장수동).
◇손양원 목사와의 만남
'박재훈'이란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동요 '산골짝의 다람쥐' '엄마엄마 이리와' '송이송이 눈꽃송이' 등의 작곡가가 바로 박 목사님이시고 한국 동요의 대부다.
그가 1947년 등사기로 갱지를 밀어 만든 '일맥(一麥·한 알의 밀알) 동요집'은 해방 후 최초의 동요집이다.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70년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고 이후 목회활동을 했다.
그런 그의 삶에 손양원 목사가 들어온 것은 교회 세미나를 위해 지난 2004년 여수의 애양원을 방문한 때였다.
"한센인 시설 애양원과 손 목사 기념관을 둘러보다 발가락이 썩어 떨어진 한센병 환자의 발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내는 그분 그림을 만났지요. 그 앞에 쓰러져 울었습니다. 아, 예수가 여기 살았었구나…."
그는 "책을 통해 머리로만 알았던 손 목사를 가슴으로 만난 순간이었다.
내가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분 얘기를 음악으로 전하기로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한 작가에게 가사를 받아 곡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은 더뎠고, 2년간 겨우 1막을 쓰다 찢어버렸다. 애써야 겨우 나오는 가사와 곡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두 개의 암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도‘오페라 손양원’을 작곡해낸 박재훈 목사(오른쪽 끝)가 23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연습실에서 연습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그가 필생의 역작으로 완성한 오페라 손양원은 내달 8일부터 무대에 오른다. /이준헌 기자 heon@chosun.com

며칠 뒤 1막 첫 부분인 애양원 한센인들의 기도 합창 부분 가사가 팩스로 들어왔다. "주님 우리 육체가 병들었습니다. 영혼이 병들었습니다. 겨레가 병들었습니다…." 박 목사는 "가사를 본 순간 가슴이 콱 막히고 목이 메었다" 며 "이런 가사라면 오직 돈만 좇는 사회에 인간 손양원의 정신을 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암세포 하나 하나가 음표로"
엎드려 기도하던 그에게 어느 날 리듬과 하모니가 오선지 위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2막 20곡으로 구성된 오페라의 틀을 잡아갔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뜻에 따라 오빠 둘을 죽인 살인자를 살리러 국군 부대를 찾아가는 16살 소녀 동희는 노래한다. "찢긴 가슴 움켜잡은 한 영혼이 여기 있네, 용서라는 큰 기쁨 내 안에도 채우소서….'
박 목사는 "내 몸속 암세포 하나하나가 음표가 되어 세상에 나왔다"며 "손 목사가 남긴 희생, 사랑, 화해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아직도 계속 고쳐 쓰고, 빈 부분을 메워가고 있다"고 했다.
☞ 박재훈(90) 목사
1922년 강원도 김화에서 태어나 1942년 평양 요한학교 졸업 후 일본 도쿄제국고등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평양 인근에서 소학교 교사로 일하다 광복 후 많은 동요를 지었다. ‘어서 돌아오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등을 작곡, 개신교 찬송가에 한국인 작곡가로는 가장 많은 9곡이 수록됐다. 창작 오페라 ‘에스더’ ‘유관순’도 만들었다. 1967~73년 한양대 음대 교수를 지냈다.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가 캐나다에 정착했고, 1982년 60세 때 목사 안수를 받고 토론토에서 목회했다. 지난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오늘의 세상] 손양원 목사 (1902~1950)

1939년 7월 전남 여수의 한센인 시설 애양원에 부임했을 때, 전도사 손양원은 이렇게 기도했다.
식량도 귀했고 치료약도 없는 애양원은 온몸에 피고름과 진물이 흐르는 환자로 넘쳐났다. 손양원은 '장갑을 끼고 장화를 신어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손 목사의 딸 손동희씨는 책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아가페출판사)에서 "아버지는 한센병 환부에 사람 침이 좋은 약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처음엔 오히려 환자들이 당황해 펄쩍 뛰며 물러서곤 했다"고 회상했다.
애양원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그는 1940년부터 8·15 광복 때까지 옥고를 치렀고, 194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불행이 찾아왔다.
1948년 여수·순천 반란 사건 때 동인·동신 두 아들이 좌익 청년들에게 총살을 당한 것. 반란이 진압된 뒤 범인들이 잡혔다. 당시 16세이던 손 목사의 딸 동희씨가 직접 국군 부대로 찾아갔다.
"아버지가… 오빠를 죽인 사람을… 때리지 말고 살려주면…."
지켜보던 군인들도 함께 울었고, 총을 쏜 범인 중 하나로 죽은 시신에 확인 사살까지 했던 안재선은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목숨을 건졌다.
손 목사는 안씨를 양자로 삼았고 안씨도 나중에 신학을 공부한다.
손 목사는 6·25전쟁 때에도 피란 요청을 모두 물리치고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병원과 교회를 지키다 1950년 9월 28일 북한군에게 총살당했다.
손 목사의 이야기는 책과 영화 '사랑의 원자탄'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